2016. 9. 19.

제16회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가상의 정치> (2016. 8. 4~8. 12 / 한국영상자료원, 서교예술실험센터 외)


아트인컬처 20169월호 (art in culture, vol.17 no.9) pp.68-69
 
FOCUS크리틱

가상의 정치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8.4~12 한국영상자료원, 서교예술실험센터 외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다양한 스펙트럼의 뉴미디어 작품을 통해 대안영상예술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하는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이 올해 16회를 맞이했다. 뉴미디어대안영화제, 뉴미디어아트전시제, 뉴미디어복합예술제로 구성된 이 행사의 올해 주제는 가상의 정치, 가상공간에서의 다양한 매체와 신체가 가지는 정치적 양상에 주목하고 있다. 가상이 실재가 되고, 오프라인에서 수행되는 활동과 행위들이 온라인 공간으로 수렴 및 확산되며, 디지털 파놉티콘이 도처에 산재하는 오늘날의 환경 속에서 과연 정치성은 획득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가상공간의 정치성게임
 
열흘 남짓한 축제 기간 동안 장르영화, 퍼포먼스영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 다채로운 형식의 영화 78편과 사운드아트, 인터랙티브아트 등 타 장르 예술과의 혼성을 시도한 뉴미디어아트 작가 19()의 작품들이 한국영상자료원, SMIT시네마, 인디스페이스, 서교예술실험센터, 미디어극장아이공, 아트스페이스오, 갤러리메이 등 총 7곳에서 선보였다. 특별프로그램으로는 <핀란드 미디어아트 특별전>을 마련했다. 핀란드 전자음악의 선구자인 에르키 쿠렌니에미(Erkki Kurenniemi)의 작업을 필두로 하여 핀란드 미디어아트의 태동기를 살펴보고,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여 자연, 평등, 교육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21세기 작품들까지 50여 년에 걸친 핀란드 미디어아트의 흐름을 망라했다. 또한 핀란드 미디어아트 배급센터 AV-아르키의 활동을 소개하는 시간도 있었다. 한편 사진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 호주관 대표작가로 선정된 트레이시 모팻(Tracey Moffatt)의 회고전이 개최됐다. 개인 간의 갈등, 유년 시절의 잔인함, 호주 개척지에서의 거친 삶, 스테레오타입의 전복, 흑인 및 백인 호주인 사이의 관계 등 호주 원주민 여성으로서의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인 의미로 확장하는 모팻의 작품 세계를 총 10편의 영화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기회였다.
 
출품작 중 나무, 구름, 관통, 밀기와 부딪히기 등 컴퓨터 게임 속 이미지를 철학적으로 고찰한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Parallel ->, 프랑스 출신의 비디오아티스트이자 2013년 터너프라이즈 수상자인 로르 프로보스트(Laure Prouvost)의 설치작품 <We Would Be Floating Away From The Dirty Past>의 일부인 <If It Was>는 뉴미디어의 확장성을 새삼 확인하게 해 주었다. 아울러 전하영의 <저 소리 부분을 지워 버릴 것입니다>는 윤석남의 글, 목소리, 작품 및 작업실 이미지를 중첩하여 시영화라는 독특한 장르를 고안해 선보였다. 강현구의 <사운드 드로잉-북아현동 앙상블>은 서울의 주택 재개발 및 재정비 촉진지구 풍경을 소재로 음악을 만들고, 악보에 그린 선율들로 리듬감 있는 화면을 구성한 새로운 감성을 구현하며 공감각적 경험을 유도해냈다.
 
특히 대구 지하철 참사, 세월호 침몰사고 등 사회적 재난을 겪고 비극적 경험을 개인의 일상으로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는 생존자 및 유가족의 마음 속 솔직한 이야기를 기록한 유비호의 <이너뷰(Inner View), 국내 대참사 당사자 및 가족 8명의 인터뷰>, 예술의 의미와 기능, 예술가의 삶과 노동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연설문의 형식으로 담담히 토로하는 채윤진의 <Speech in the Void>는 관람객에게 묵직한 질문들을 던졌다. 가상현실을 넘어 다차원의 증강현실에 열광하는 사람들로 지구촌이 들썩이고 있는 지금, 단순히 독립영화나 단편영화로 분류하기 힘든 동시에 특별한 테마를 지향하는 영화제나 미디어아트 전시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뉴미디어의 다양한 층위와 화법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 방대하고 유용한 텍스트를 제공하는 축제의 자리였다.
 
/ 문호경

네마프 토크 <핀란드 미디어아트의 역사와 현재>

트레이시 모팻, <Night Cries: A Rural Tragedy>, 1989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강현구, <사운드 드로잉-북아현동 앙상블>, 2015

유비호, <이너뷰(Inner View), 국내 대참사 당사자 및 가족 8명의 인터뷰>, 2015년

2015. 6. 15.

해방70주년기념전시회 <전쟁에서 평화로 과거에서 미래로 : 일본군 '위안부', 역사적 진실과 정의> (2015. 6. 15 - 6. 21 / 국회 의원회관)


2015년 저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해방70주년기념전시회
전쟁에서 평화로
과거에서 미래로
일본군 '위안부', 역사적 진실과 정의

입니다.


기획 : 동북아역사재단
          난징대학살희생자기념관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집필 : 김은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연구교수)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박정애 (동국대학교 대외교류연구원 연구교수)
          난징대학살희생자기념관

전시기획 : 문호경 (독립 큐레이터)


전시디자인 : (주)커뮤니케이션 우디



작년 9월부터의 오랜 준비, 여러 사람들의 땀과 노력, 다양한 주장과 의견만큼이나 여러 가지 갈등과 오해, 그리고 인내와 화해로 점철된 작업입니다.

주제의 무게감과 함께, 저 개인적으로도 긴 침묵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만든 전시이기에 마음이 복잡하네요.

함께 만드느라 고생해주신 김은경 선생님, 남상구 선생님, 박정애 선생님, (주)커뮤니케이션 우디 가면정 대표님&김은정 대표님&김은화 디자이너, 코라싸인 박윤석 대표님, 휴 매니지먼트 장상욱 대표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 문호경

2014. 10. 12.

디디피오픈마켓 DDP Open Market [동대문문화마켓 Dongdaemun Culture Market]을 마치며


디디피오픈마켓이 끝난 지 벌써 일주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마켓에 참여했던 분들 모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셨겠죠...
변덕스러운 날씨와 녹록치 않은 현장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함께 자리를 지켜주신 [동대문문화마켓] 참가 상인 및 디자이너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번 오픈마켓을 통해 맺은 인연과 쌓은 경험이, 또 다른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봅니다.
고리타 / 돌레코드 / 랑간 / 민트 소품 / 부이 / 알짜 밀리터리 / (주)엔씨엔 / 올드 콜렉션 / 청계천 서점 / 청계 콜렉션 관계자 모든 분들,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 DDP Open Market


디디피오픈마켓 [동대문문화마켓]

문호경
문화컨설턴트 (전, 국립여성사전시관 학예연구사)

어떤 물건에 관심을 갖고 수집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콜렉터'라고 부른다. 그들이 모아놓은 물건들을 보면, 수집가의 개인적인 취향은 물론이거니와 수집한 대상이 통용되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유추할 수 있다. 아울러 물건이 원래 속해 있던 사람 또는 장소로부터 지금의 콜렉터에게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뒷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이런 사정으로 콜렉터는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이들을 친구이자 경쟁자로 삼아 정보를 공유하고, 자신의 콜렉션과 수집담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싶어 한다.

상인들 역시 콜렉터의 특징을 갖고 있다. 가게마다 매대마다 다루는 물건의 품목과 수량, 진열방식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 가게, 그 매대만의 정체성을 보여 준다. 상인들은 자신이 취급하는 물건의 유래와 쓰임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게 유용할 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그들은 각각의 물건에 대한 경로와 경험을 기억하고 있으며, 물건의 값어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고객과 소통할 때 즐거움을 느낀다.

하지만 이들의 콜렉션은 단순히 보고 만지며 즐길 수 있는 낭만적 대상만은 아니다. 매일 닦고 정리해서 판매하는 상인들의 물건에는 고단한 노동과 진한 삶의 이야기가 배어있다. 이번 [동대문문화마켓]에서 소개하는 상인과 그들의 물건 앞에 서면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제강점기 남대문시장 및 종로와 겨루던 동대문 지역 상권, 1930년대 근대적인 상가로의 재편, 1960년대 평화시장 개장부터 2014년 DDP 개관까지, 한국의 근현대사와 함께 해 온 동대문 지역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물건들을 대할 때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그 사연들 때문이다.























ⓒ 문호경

2014. 9. 16.

<디디피오픈마켓 DDP Open Market> (2014. 10. 1 - 10. 5 / DDP)


올 해 상반기에 참여했던 전시회 <동대문 사랑 디자인 :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이어, 하반기에는 <디디피오픈마켓>의 한 섹션인 '동대문문화마켓'을 맡아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땡볕과 폭우 속에서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맺고 '동대문문화마켓'에 기꺼이 참가해 주시는 모든 상인 및 디자이너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무쪼록 신나고 재미있는 경험으로 기억되는 2014년 10월이기를 기대해 봅니다^^.

http://ddpop.net
http://www.seouldesign.or.kr/bbs2/view.jsp?seq=3446&code=001008
ⓒ DDP Open Market


가장 큰 시장인 동대문에 열리는 가장 재미난 시장
동대문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24시간 역동하는 거대한 시장입니다. 그 방대한 시장 속에 DDP오픈마켓은 DDP와 공존하는 활기 넘치는 동대문 지역문화의 단면을 소개하고, 합리와 미의 가치를 추구하는 다양한 디자인․예술 결과물을 통해 삶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창조적 생각과 착한 디자인, 아름답고 재미난 이야기와 흥미로운 볼거리가 있는 어울림 축제의 장입니다.

다리 밑에서 발견하는 별별 창의시장
DDP오픈마켓에서는 타 디자인 마켓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하고 별난 물건들이 전시되고 판매됩니다. 동대문 지역을 상징하는 시장문화와 다문화, 창신동의 새로운 디자인 문화를 창조하는 디자이너들의 도전 정신, 작품으로써의 담론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실험적 디자인 등을 시민들이 즐겨 찾는 DDP 명소 미래로 밑 어울림광장에서 나누고자 합니다. 국내외 70여 개의 디자이너 그룹과 소상인들이 참여하여 만드는 DDP오픈마켓은 누구나 함께 모여 즐기는 해락(偕樂) 시장입니다. 

세상을 이롭게, 아름답게 하고자 모인 큐레이터들의 협력시장
[DDP오픈마켓]에는 12명의 국내외 큐레이터들이 기획한 크고 작은 7개의 테마시장에 65개의 가게가 있습니다. 7개의 테마를 가진 시장은 디자인, 문화예술, 스토리 마케팅 등 다양한 활동 영역의 큐레이터들이 가까운 청계천에서부터 멀리 코펜하겐까지 발로 뛰어 모은 재미있고 다채로운 상품들로 채워집니다. 동대문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연, 다른 세계와의 문화 소통 방식, 상품을 통한 공감과 감동의 가치 등을 큐레이터들이 전달하고자 기획된 협력전시이자 새로운 방식의 협력시장입니다.

● 동대문문화마켓 : 문호경(문화컨설턴트)
● 멀티컬쳐마켓 : 김태연(모쉬룸숲 대표), 박혜진(세렝게티구멍가게 대표), 복지희(쉼 대표)
● 창신동오픈마켓 : 신윤예, 홍성재(문화예술기획공간 [000간 사무소])
● 착한무역마켓 : 김경국(쏠레블즈 대표)
● 이야기디자인마켓 : 김희재(올댓스토리 대표)
● 국제디자인마켓 : 왕시셩(중국 북경 오투 크리에이티브 인스티튜트 대표), 이시마츠 타케요시(일본 나고야 공업대학 교수),
                          칼 몰링 그라노프(덴마크 코펜하겐 발데르 파운딩 파트너 & 매니징 디렉터)
● 독립출판마켓 : 김명수(Pages Press 대표)

별의별 것들이 다 들어온다. 이런 것도 있네?



2014. 6. 29.

로드스꼴라, 『남미에서 배우다 놀다 연대하다』


로드스꼴라, 『남미에서 배우다 놀다 연대하다』, 세상의모든길들, 2013년


남미 문학을 통해 패러다임의 전환을 엿보고,
공정무역의 루트를 들여다보면서 거대한 자본의 물결을 읽어내며,
문명의 충돌, 갈등, 화해, 통합, 그리고 융합의 과정을 살펴보며 하이브리드에 대한 질문을 해 보고,
거대한 자연 앞에 서 보는 것,

을 목표로 남미로 떠난, 길 위의 학교 '로드스꼴라' 친구들의 색다르고 생생한 그리고 너무도 솔직한 기록들.
최근 영국에 다녀 온 로드스꼴라 5기 떠별들의 이야기도 엄청 '익사이팅'하리라 기대합니다^^.

ⓒ 로드스꼴라, 2013


8페이지
이어서 들어온 떠별들도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엄마가 아픈데 괜찮으실까요? 우리 가족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을까요? 연애는 과연 가능한가요? 글을 써서 벌어먹을 수 있을까요? 저 머나먼 대륙 아시아, 그중에서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파릇한 청춘들의 질문에 목이 두껍고 어깨가 단단하며 앞뒤로 두터운 몸통을 지닌 아이마라 아저씨는 끝까지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 답을 해주었다. 엄마는 조만간 나으실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가족들은 약간의 고비들이 있지만 그 시간만 잘 넘긴다면 모두 건강하리라, 연애의 대상은 신중하게 선택을 해야 하느니라, 각고의 노력을 한다면 네가 원하는 생을 살리라... 점괘를 받은 떠별들은 모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물러갔다. 참으로 용한 점괘, 에 슬몃 웃음이 났다.


130페이지
역사는 대의명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이 모여 머무르고 흘러간다.


307페이지
그러나 아옌데는 서서히 다시 일어섰다.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던 파울라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더 깊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북돋우며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갔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것일까. 그 밑바닥에는 그녀의 양부가 어린 그녀에게 해 주었던 한마디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너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단다."
그녀는 알았다. 넘어지고 헤매는 건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가 겪는 일임을. 외로움과 열등감,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은 세상 모두가 겪는 감정임을. 그래서 두려운 순간이면 항상 마음속에 되새기고는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다고.


313페이지
열아홉 살의 내가 배운 글쓰기는 두 단계로 집약될 수 있다. 1단계, 멋진 이야기를 써 보겠다고 픽션을 시도하지 말고 자신의 경험을 멋지게 쓴다. 2단계,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자. 그러니까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말이야 쉽지만 솔직한 자기 이야기를 이미 지나온 기찻길을 바라보듯 담담하게 쓰는 일은 여러모로 용기와 내공이 필요했다.


358페이지
근데 이제 알겠다. 방황이라는 게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그건 신나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sin prisa! 서두르지 않아도 돼!"
나는 내 속도에 맞춰 콧노래 부르며 걷다가 예쁜 벤치가 보이면 잠시 쉬고, 막다른 길이 나오면 다시 돌아서고, 갈림길이 나오면 좀 더 끌리는 쪽으로 가면서 내 길을 찾아가고 있다.
조금씩 천천히 흐릿하게 무언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380페이지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든,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정은 때때로 두 달 여행의 전부를 삼켜 버릴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고산도시 라빠스의 언덕을 올라갈 때 내쉰 내 지친 숨도, 우유니의 새벽에 본 수많은 별들과 띵고마리아에서 들었던 앵무새의 울음소리조차 모두 격렬한 사랑의 감정 앞에 작은 기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2014. 6. 6.

전용일 금속공예전 <사물의 자리> (2014. 6. 5 - 6. 25 / 갤러리 메종르베이지)


전용일 금속공예전 <사물의 자리>
2014. 6. 5 - 6. 25 / 갤러리 메종르베이지


최근 영국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ictoria and Albert Museum)의 소장 작품 목록에까지 이름을 올린, 금속공예가 전용일의 <사물의 자리> 입니다.

정갈하면서도 위트 있는 작품들이 결코 가볍지 않은 존재감으로 다가오는 전시회입니다. 오롯이 외투가 걸려 있는 옷걸이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울컥해지기까지 했으니까요.

공예계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이슈들을 고민하면서, 작가이자 교육자로서 무엇보다 공예인으로서 자신의 신념과 태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의 '작가 노트'는 참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게 만듭니다.

조용한 아침, 다시 가서 보고 싶은 전시입니다.


ⓒ 사물의 자리 2014


"여기 30여점의 작품은 주로 손과 손도구로 제작한 공예품이다. 나무를 사용한 몇 점을 제외하면 모두 구리, 구리합금, 은 등 비철금속의 판재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금속판을 성형하는 판금기술이 이들 작업의 중심에 있다. 금속 평판을 망치와 모루(받침쇠)를 사용해 늘여 변형하고, 매끄럽게 고르고, 이들을 서로 이어 붙여 입체의 외피를 만들거나 열린 형태를 구축하는 것이 주요 얼개이다. 금속판을 점진적으로 변형하기 위해 수없이 반복하는 망치질은, 마치 점묘를 통해 서서히 형상을 드러내는 회화 작업과 유사하다. 또한 성형한 각각의 형상을 정교하고 수리적인 접합을 통해 공간 구조물로 구현하는 과정은 한 채의 집짓기와 닮아있다. 금속공예는 가장 얇은 벽으로 지은 건축물과 같다.

이들은 심미성을 앞세운 미술품이면서 동시에 생활공간에서 사용하는 일상 사물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보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접촉하고 사용하는 대상이다. 사물 속에서 심미성과 기능성을 함께 추구하는 일은 어렵고도 흥미롭다. 이 과정을 통해 작품 속에는 조화, 절제, 함축이라는 미덕이 담긴다. 기능에 대한 고려가 표현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실마리가 되는 경우에 내 작업은 투명하고 명쾌해진다. 자유지상주의자라면 공예가나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 나는 사용과 무관한 미술품 속의 아름다움도 즐기지만, 기능적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사물이 한층 경이롭다. 이들 속에서 종종 시적 함축성을 발견한다. 보는 그림, 읽는 책보다 중요한 것은 내 손으로 쥔 숟가락이나 아내의 손이다.

사물도 자리가 필요하다. 여기 있는 작품들은 갤러리 보다 일상의 생활공간에서 빛을 발하도록 의도된 것들이다. 이들 공예품은, 자리가 바뀌어도 크게 의미가 변하지 않는 자율적인(혹은 순수한) 미술품과 다르다. 공예품은 다른 사물들과 포개진 채 삶의 공간에 자리를 잡고 시간이 경과할수록 서서히 의미를 드러낸다. 현란한 시각 이미지와 스토리텔링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우리 시대의 미술관, 현실과 격리된 화이트큐브 속에서 많은 공예품들이 존재론적 딜레마를 겪는다. 또한 이런 연유로 인해 공예가 변하기도 한다. 이벤트와 퍼포먼스에 골몰하고 실물보다 이미지를 앞세우는 동안, 사물의 자리는 애초 작품의 의도 속에 포함되지 못한다. 사람이 그렇듯 사물도 자리가 필요하다."

- 작가 노트




 






 ⓒ 문호경